크리스마스 이브의 특식. by보패(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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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패 | 2019-12-29 |
언제나 크리스마스 이브엔 특별한 것을 먹고 싶다. 매일 먹는 걸 이날도 먹으면 왠지 하루를 헛되이 흘려보낸 기분이 든다. 크리스마스는 자본주의의 축제. 이런 날 평범한 것을 먹으면 그 축제에서 나만 쓸쓸이 뒤처진 것 같다. 종교가 뭐예요, 라는 질문에 늘 “FSM이요(*FSM: Flying Spaghetti Monster,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라고 답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올해 이브엔 햄버그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었다. 밥 대신 버터 옥수수 통구이를 곁들였다. 육즙 가득한 햄버그와 버터 향기 솔솔 나는 옥수수를 번갈아 먹으니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햄버그를 먹으며 문득 7-8년 전의 어느 이브를 회상했다. 그날도 나는 이브 만찬으로 햄버그를 정성껏 만들었다. 사우스파크를 틀어놓고 방금 만든 햄버그를 한 입 먹는 순간, 아 너무 맛있어! 하고 혼자 탄성을 질렀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근처에 사는 오래된 친구였다. “나 방금 남친한테 차였어... 진짜 너무 미안한데 지금 와 주면 안돼?” 친구는 울먹이고 있었다. 친구의 남친은 금발벽안의 인텔리 유럽인이었다. 이브에 그를 자취방에 초대해서 오붓하게 보낼 거라고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나는 한 입밖에 못 먹은 햄버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을 바라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진짜 죽을 것 같아.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어.” 이런 말을 듣고도 안 달려가면 사람도 아니지. 응, 그렇겠지. 결국 나는 바로 옷을 주워입고 택시를 탔다. 친구네 집에 가 보니 주방이 어수선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름모를 요리가 다 식은 채 프라이팬에 담겨 있었다. “걔가 요리한 거야. 제대로 먹지도 않고 가버렸어.” 친구는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고 괜찮았던 분위기가 어쩌다 갑자기 파국으로 치닫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 같은 푸념도 함께였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친구를 위로해주고 자정이 다 되어 돌아왔다. 다 식어빠져 접시에 꾸덕하게 들러붙은 햄버그를 버리면서 나도 모르게 아아, 기빨려, 올해 이브는 망했어 하고 중얼거렸다. 와 줘서 고마워, 미안해 라는 공치사를 들었음에도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흘러 올해의 크리스마스. 이제 그 친구는 내 곁에 없다. 이브를 함께 보낼 남자는 없지만 늙고 작은 개가 있다. 덥수룩한 털에서 꼬순내를 풍기며 내 곁에 딱 붙어서 만찬을 관람한다. 만찬이 끝날 때까지 “지금 와 줄 수 있어..?”라는 전화 같은 건 걸려오지 않는다. 햄버그는 어느 때보다 맛있었다. 음, 이 정도면 행복한 것 같아. 내년 이 날엔 무얼 해 먹을까? 그런 생각을 한 이브였다. -끝- 이드문학관에 집밥 아ㅡ트 (12), <찬바람의 맛>편 업뎃. https://m.idpaper.co.kr/book/view.html?workSeq=3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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줗다 | ||
ge**** | 2019-12-29 | 답글쓴이 돈주기 ![]() |
언니 사랑해 | ||
su*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요리 어떻게 공부했는지두 써주세요 | ||
he*******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글 넘좋다 언니 올한해도 이드를 빛내주어 고마워 새해 복 많이 받구 건강한거 먹고 건강하기를! | ||
do**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나 어제 갑자기 토마토 스프 생각났음 | ||
윤석킴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ㅋㅋㅋ 재밌다 왕년에 하루키 소설 좀 읽었네 | ||
so*****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he 언니 따로 공부랄 것까지 한 건 없는데 어릴 적부터 관심은 쭉 많았어. 언제 글로 한 번 써 볼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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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패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이번에도 잘 봤어!생선구이는 오븐에 굽는거야? | ||
db******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보패글 너무 좋아 계속 올려줘 | ||
va***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보패언니 글도 잘쓰네. 사랑해 | ||
su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힝 몇년 전 언니 친구 왠지 야속해 내가 다 속상 ㅋㅋ | ||
Poi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ㅜ ㅅ ㅠ햄버그... | ||
sevensoun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예술가야. 엄청난 천재 예술가. 너무 좋다. 모든게 다 궁금해. 어디 사는 어떤 사람인지.. | ||
ki********** | 2019-12-30 | 답글쓴이 돈주기 ![]() |
db언니 생선은 스텐팬이나 에어프라이어로 구워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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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패 | 2020-01-01 | 답글쓴이 돈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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