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국집. by보패(21)
보패 2019-11-25
살면서 가장 슬피 울었던 때가 언제였더라?

나는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이 죽었을 때. 열 살, 열 한 살 그쯤 때였나. 그 에피소드를 보고 충격을 받아 대성통곡하고 사흘 내리 식음전폐했다. 엉엉, 오스칼이 죽었어. 오스칼이 죽었다구. 이럴 수는 없어. 엉엉엉. 학교에서도 몇몇 오스칼 광팬들과 부둥켜 안고 울부짖었다. 오스칼은 나의 아이돌이자 첫사랑이었다. 장미 장미로 태어난 오스칼, 정열과 화려함 속에서 살다 갈 거야. 영원히 못 잊을 주제가 가사. 치매에 걸려 내 이름조차 잊어도 이 가사만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첫사랑의 열병을 2D로 빡세게 앓은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프랑스를 제 2의 조국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뽕을 치사량 직전으로 맞은 것이다. 당시 집에는 엄마가 공부 삼아 보던 최신 올컬러 요리책이 가득했다. 의리에 죽고 못 살던 부친이 친구 보증 잘못 서서 집안 거덜내기 전, 할아버지의 알토란 같은 재산으로 온가족이 호시절을 즐기던 때였다. 나는 엄마의 요리책 중 특히 프랑스 요리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프랑스인의 식사 매너까지 세세히 수록된 책이었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지만, 아페리티브... 앙트레... 오르되브르... 뫼니에르...쁘띠푸르...어쩌구, 이런 용어들을 외워가며 맛과 식사 과정을 상상했다.

“엄마, 프랑스 요리 해 줘.”
“뭐?”
“(책을 펼쳐 가리키며) 이거.”
이러면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얘, 송아지 고기를 갑자기 어디서 구하니? 그 책에 나온 거 만들려면 여기서 안 돼. 진짜로 프랑스 시장에 가서 장을 봐야 돼. 아휴 내가 저 책을 괜히 샀어.”

할 수 없이, 엄마가 돈까스나 햄버그 스테이크를 해 주는 날에만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서 프랑스식 테이블 매너를 써먹었다. 시뮬레이션 했던 걸 그렇게라도 써먹고 싶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십대 초반. 드디어 프랑스 파리에 갔다. 배낭여행으로. 나는 경비를 아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런던에서 시작해 이스탄불까지 75일 걸리는 여정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자, 파리에 왔으니 프랑스 요리를 먹긴 먹어야 하겠는데. 주머니 사정은 빠듯하니 어쩐담. 첫날, 노트르담 성당 근처에 있는 저렴한 레스토랑을 골랐다. 체크무늬 테이블보 위에 두꺼운 투명 아크릴을 씌워 놓은 걸 보고 아 여기가 프랑스 김밥천국인가 생각했다. 뜨내기 관광객들만 가득한 식당이지만 나름 코스였다. 헌데 무얼 먹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나는 안 좋은 기억을 빨리 잊는 편이다).

에스카르고를 먹었던 건 확실히 기억난다. 너무 여윈 달팽이라 씹을 살점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때 교실 뒷편에서 애들이랑 다같이 상추며 당근이며 줘 가며 키우던 달팽이가 생각나고 막 그랬다. 먹고 나서 무척이나 헛헛했다. 나오자마자 길에서 크레페를 사 먹었다. 크레페조차 맛이 더럽게 없었다.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프랑스 요리는 이런 게 아닌데(*그보다 최소 5배는 더 돈을 썼어야만 했다).

이게 아닌데ㅡ라면서도 결국 파리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목적은 베르사이유의 장미 성지순례. 열흘 간 머문 호스텔 근처에 중국집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홍콩 뭐시기. 쇼케이스에 진열된 요리를 고르면 무게를 달아 파는 곳이었다. 나는 매일 저녁 거기에 들렀다. 고기 요리 한 가지에 볶음밥, 배가 많이 고픈 날이면 달걀 스프나 채소 반찬을 더 골랐다. 한켠에 비치된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그곳의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먹고 오는 거다. 모든 건 셀프서비스. 이어폰을 끼고 묵묵히 먹으면서 다른 손님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퇴근길에 들러 테이크아웃 해 가는 손님들, 종이상자에 담은 중국음식으로 저녁을 먹는 프랑스인들. 식사하고 돌아가는 길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베르사이유 궁에 다녀온 날에도 종일 걸어 지친 몸을 이끌고 거기 가서 저녁을 먹었다.

왜 그랬을까? 엄청나게 맛있는 건 아니었는데. 모르겠다. 그냥 거기가 이상스레 좋았다. 자꾸 가고 싶었다. 마음이 편했다. 동네 백반집처럼.

하도 매일 가니까 점원도 아는 척을 해 왔다. 하필이면 마지막 밤에. 나 이제 내일부턴 못 와. 내일 아침에 다른 나라로 가거든. 잘 있어. 맛있었어. 프랑스의 중국집에서 영어로 나누는 어색한 작별인사.

오스칼이 나를 파리로 이끌었지만 결국 그곳에 가서 가장 많이 먹고 온 것은 중국음식이었다. 파리를 생각하면 그 집이 떠오른다. 단 며칠이었지만 나의 단골집이었던 프랑스 중국집.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 확인해 보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있을 거라고 믿고 싶으니까.

때론 그렇게 내버려두고 좋을 대로 생각하면서 아련한 기분에 젖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 집도 그렇다.

<끝>.

문학관에 집밥 아ㅡ트 11탄 업뎃했다.
가을을 관통하는 집밥의 향연.
https://m.idpaper.co.kr/book/view.html?workSeq=3643


파리 중국집/베트남집 다 맛난다 ㅎㅎ
바질칼국수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기승전밥
mi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첫번째 사진 보니 나도 어릴적에 봤었던 요리책(지금도 있음) 사진들 느낌이 물씬 나서 좋다.
판리자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보패 요리교실 할 생각 없어? 원데이 클래스루. 배워보고싶어
그리고 냉동 활용을 잘하는거같은데.. 그거 관련해서 책내도 좋을듯.. 이정도 퀄이면 진짜 출판해도 된다고 봅니다..
모냐모냐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언니 원래 요리에 관심 많았어?
손재주 좋고 다른 살림 정리정돈 이런 것두 잘해?
나 완전 무슨 외계인 보는 기분이야~~~
(당근 좋은 뜻이야!!!)
ss****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언니 밥상은 볼때마다 경이롭다. 매끼 어떻게 저렇게 정성스럽게..나는 저중에 한 메뉴만 차려먹어도 에너지 방전되던데..흉내도 못내겠어 언니거는
mi***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어릴때부터 보통이 아니었군 ㅋㅋ
난 언니가 너무 잘차려 먹어서 백수인 줄 알았어!! 일하는데 아침도 멋지게 차려먹고 어케 그래?!!!!
durabba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모냐모냐 언니

요리교실은 너무 스케일 큰 일이라 생각도 못 하겠다. 우선 당면과제(?)는 유튜브로 설정했어. 냉동 활용 같은 것도 거기서 보여주려고.
보패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이언니는 손으로 하는건 다 잘하나봐
as******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볼때마다 행복해지는 레시피
cl********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ss**** 언니.

응 어릴 적부터 요리에 관심 많았어. 그리고 손으로 하는 건 배운 적 없는 것도 얼추 다 웬만큼 흉내는 내. 부모한테 손재주 유전자 몰빵 받았음.

그리고 집안일은 음... 부엌일이랑 빨래랑 쓰레기 분리수거 배출은 할 만 한데 청소가 넘 귀찮아. 마지못해 청소기나 돌리는 수준.
보패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ㄴ대단한 능력이다 이상적인 식단이야
나이들수록 한식에 회의적이었는데 따라할수만 있음 따라하고파~~~
ss**** 2019-11-25 답글쓴이 돈주기   
진짜 글 존나 잘쓴다....
it******** 2019-11-26 답글쓴이 돈주기   
ㅋㅋㅋ웃겨
글도 잘쓰고 손재주도 좋고 당신은 악마의 재능충..
rl******* 2019-11-26 답글쓴이 돈주기   
주먹밥좀
emi 2019-11-26 답글쓴이 돈주기   
보패언니 이드 요리교실 한번 가자
도토리자매 2019-11-26 답글쓴이 돈주기   
durabba 언니

아침밥을 잘 해 먹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침에 하는 걸 자기 전에 해 놓고 잔다.

가방 꾸리기, 입고 갈 옷 세팅, 머리 감고 말리는 것 등등. 그리고 이렇게 절약해 만든 시간은 아침밥 해 먹는데 할애함

물론 엄청 바쁠 때, 피곤할 땐 안 해 먹음
무첨가 두유랑 프로틴바로 간단하게 해결하는 날도 있음. 간장계란밥 해 먹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연중 극성수기ㅡ평범한 시기ㅡ극비수기 이렇게 극단적인 플로우라, 극성수기에는 밥도 제때 못 챙겨먹을 만큼 바쁜데 극비수기엔 베짱이 반백수임. ㅋㅋㅋㅋ 반백수 타임에 특히 요리를 열심히 해
보패 2019-11-26 답글쓴이 돈주기   
wn 언니야

장보기 비용 평균 15만원으로 잘 꾸려나갈 수 있는 이유 알려드림.

1. 제철 식재료가 아니면 안 산다.

2. 활용도 떨어지거나 내 수입에 비해 비싸다고 생각되는 식재료는 안 산다 (연어, 랍스터, 블랙타이거새우, 농어, 병어, 브리 치즈, 까망베르 치즈, 한우, 샤인머스캣 등등.. 아니 쓰다보니 침 고이네 먹고싶네 흑흑)

3. 장은 한 곳에서 다 보지 않고 항목별로 저렴하고 전문적인 곳에 가서 산다.

돼지고기는 양파 먹인 한돈만 파는 동네 푸줏간,
매일 먹는 채소는 좀 못생겨서 마트 납품 탈락한 채소만 떼어와서 박리다매로 파는 청과상,
과일은 낱개 판매를 하고 다 달콤한 것만 파는 동네 과일집,
참치•베이컨•스위트콘•소스 같은 건 이마트몰에서 쿠폰 써서 쓱배송,
대용량으로 뭐 필요하면 도보 15분거리의 식자재 도매 마트,
치즈•수입 향신료는 백화점 식품관(다품종 소량판매에 할인도 자주 때림)....

4. 돈 주고 산 식재료는 썩히거나 상하게 해서 못 먹고 버리는 일이 없도록 선입선출 원칙을 지켜 소비하고, 소분냉동을 적극 활용한다.

그리고 마켓컬리 안 쓰고 SSG마켓이랑 올가도 안 감.
요리의 즐거움은 수직상승하지만 돈 펑펑 쓰게 되기 때문...흑흑. 하지만 내 영혼은 언제나 저기에 있음

돈 아끼지 않고 한 곳에서 다 사면 시간과 정신력은 엄청 절약되겄지. 흙수저의 잔고에 혓바닥은 부르조아라 별 수 없이 이렇게 산다 허허

보패 2019-11-28 답글쓴이 돈주기   
그 중국집을 알려주면 안되겠니?
ki****** 2019-11-28 답글쓴이 돈주기   
ㄴ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보패같은 남편 데리고 살고 싶다
글 재밌게 잘 읽었다 4달라 두고 간다
ps******* 2019-11-28 답글쓴이 돈주기   
ㄴㄴ 안알랴줌. ㅋㅋㅋㅋㅋ 그 맛이 궁금하다면 백화점 식품관에 입점해 있는 홍콩익스프레스로. 또옥같음
보패 2019-11-28 답글쓴이 돈주기   

사업자번호: 783-81-00031

통신판매업신고번호: 2023-서울서초-0851

서울 서초구 청계산로 193 메트하임 512호

문의: idpaper.kr@gmail.com

도움말 페이지 | 개인정보취급방침 및 이용약관

(주) 이드페이퍼 | 대표자: 이종운 | 070-8648-1433